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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차의 역사 1

by An마담 2020. 7. 11.

차의 역사 1

 

쓴 차가 단차보다 많지만 차에는 이 든 맛이 다 있다네 누구를 위해 이것들이 단지 쓴지 모르지만 진주 빛 손끝이 망가질 때까지 찻잎을 딴다네.  -중국의 찻잎 따는 노동자들의 노래 중에서 (봄의 정원에서 찻잎을 따는 노래)1859-

시인이 차를 찬양하는 동안, 황제는 최고의 차를 즐겼다. 공물로 받쳐지는 차는 , 중화의 지배자인 천자를 위해 특별히 제다하어 만들었다. 공물제도는 중국이 통일되기도 전인 전국시대(기원전480~221)에 시작되었다. 공물은 경쟁 제후국 간에 외교적 선물로 보내졌다. 공물은 매년 그 지역의 최고의 특산물을 궁궐로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황제는 최고 등급의 비단, 최고의 말, 좋은 도자기와 최고의 차를 위해 이 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당나라 때는 절강성 항주에서 공물로 차를 바쳤고 후대에는 복건성과 사천성에서 바쳐졌다. 오리진이 인도에서 갖고 왔다는 일곱 그루의 차나무를 심었다는 전성을 가진 몽정산 인근에서도 차를 바쳤다. 황제가 마실 차는 이른 봄에만 딴 것이므로 차를 따는 기간이 아주 짧았다. 황제의 다원에서는 엄격하게 조목별로 분류된 수확과 생산 법칙이 정해져 있었으며 순결한 처녀들을 따로 뽑아서 청정한 최고급 차를 생산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땀이 찻잎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장갑을 끼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손톱을 특별한 길이로 길러야만 했다. 가장 어리고 섬세한 새순을 소능로 만지지 않고 손톱만으로 따기 위해서였다. 수확 이전 3주 동안 소녀들은 마늘과 양파 또는 향신료와 강한 향을 가진 생선 또는 일부 야채 들은 일절 먹을 수 없었다. 그녀들의 체취가 찻잎의 섬세한 향을 손상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일하러 가기 전 반드시 목욕을 해야만 했다. 가장 귀한 공물 차는 차 따는 어린 소녀가 차나무가 아침 이슬로 아직 젖어 있을 때인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서 해가 뜨기 전 짧은 시간동안 아직 촉촉하고 부드러운 새싹을 따서 만든 것이었다. 황실의 관리들은 차 가공 과정을 세세한 부분까지 감독할 책임이 있었다 당과 송의 공물차는 아직 압축해서 만드는 차의 형태로 다양한 모양으로 만즐어졌는데 납작한 빵, 공, 또는 벽돌 모양이 대부분이었다 송의 공물차는 주로 정재유나 향신료 등의 향료를 혼합했다. 이때 특히 인기 있던 것은 용뇌龍腦라는 독특한 향료였다. 미술사가이자 중국 미술과 차문화 전문가인 스티븐D.오영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이 향료는 약간 매콤한 향이 나서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말했다. 용뇌는 보르네오 섬에서 수입되었던 장뇌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일상용품이 아니었으나 송대에는 차와 다른 음료에 섞는 향로로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황제의 차궤가 농장에서 궁정 저장실로 운송 되는 동안 땅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특별한 운송 제도가 고안되었다. 때로는 차의 형태와 물맛의 최상의 궁합을 위해 특별한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배로 실어오기도 했다. 황제의 한 한 잔 뒤에는 이런 섬세하고도 복잡한 과정이 존재했다. 송의 학자 주밀은 <계신잡식>에서 이런 복잡한 과정을 기록해서, 공물차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절정일 즈음 절강성의 운하 관리 기관은 북원에서 "거사를 위한 햇차"라고 이름 붙은 첫 번째 봉한 차를 공물로 보낸다. 차는 몯 작고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부드러운 노란 비단 주머니에 보관되었다. 노란 비단으로 안을 댄 넓고 푸른 대나무 잎에 쌓어서 관리는 이 차를 금색 자물쇠가 달린 붉은 옻칠한 상자에 넣고 붉은 인장으로 봉한다. 이것은 부드러운 대나무와 비단으로 짜 인 작은 가방에 담는다 . 차는 참새의 혀와 닮은 형태의 가장 어린 새순으로 만든다. 보통 이 단차 하나를 만들기위해서 찻잎 사십만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맛을 보기 위한 몇 잔을 만들수 있는 분량이다 때때로 외부에 거주하는 황족에게는 그들의 혈통에 따라서 하나 또는 두개가 내려졌다. 이런 공물차의 하사는 숭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야생에서 자라는 키가 큰 차나무에서 따서 만든 귀한 차 역시 황제의 입으로 갈 운명이ㅓㅇㅆ다. 처녀가 아닌 원숭이들이 차를 따는 일을 하는 우화적인 연극이 있는데, 9미터에서 12미터 높잉의 원숭이만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에서 차를 따는 이야기이다 원숭이들이 차나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아래에서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 원숭이들이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잘라서 사람들에게 던진다. 사람들은 그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집으로 간다. 또 맛있는 음식으로 원숭이를 조련해서 찻잎을 따게 한다고도 한다. 그 당시 원후차는 아주 귀한 차였다 황제는 현실에서 멀리 떠어진 고귀한 존재였고 추 따는 일에 고용된 어린 소녀들의 숫자나 원숭이에 대해서도 물론 알 리 없었다 궁중에서 어떻게 음료를 준비하는지 그 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궁중의 차 준비는 궁녀들의 몫이었고 황제의 사랑을 얻기 위해 궁녀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쟁과 질투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황제는 공물제도 아래에서 농부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시달리는지도 몰랐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공물은 농부 입장에서 나쁜 가면을 쓴 또 다른 세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황제도 연중 계속해서 찻잎을 따는 수만 명의 어린 소녀들의 아린 손톱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풍류황제라고 불리는 송의 휘종(1082~1135)은 <대관다론論>이라는 차 전문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차에 관한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직접 차를 만들어서 손님과 궁녀들에게 접대하기도 했다. 그는 그 시절의 유행과는 달리, 향이 없는 차, 특히 야생에서 자라는 아주 귀한 백차를 선호했는데 차에 용뇌나 장뇌 같은 향료를 쓰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것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다. 중국차는 명대(1368~1644)가 되어서야 잎차, 즉 향이 가미 됮 않은 차가 인기를 얻었다. 

송 휘종은 여러 면에서 유별난 황제였다. 그는 전전 황제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고 형인 신종이 즉위한 뒤헤 후사 없이 죽는 바람에 그의 바람과는 달리 중화의 지배자가 되었다. 황제로서는 무능했지만 예술가로서 뛰어났던 휘종은 시와 서예, 그림에 능했는데 그의 작품 일부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는 송 예술의 중심이 되는 화원을 지원하는 배우 세련된 예술품 수집가였다. 그는 확실히 제국 운영보다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 만주 지역 유목민족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고, 결국 북송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1127년 북송은 금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죄수가 되어 북쪽으로 유배되어 8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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