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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차끓이는 법과 차도구

by An마담 2019. 4. 30.

차 끓이는 법고 차도구 

 

 

차 끓이는 법과 차도구에 대하여

 

 

토산차

 

신라는 7세기인 문무왕때 이미 토산차가 있어 제사에 차를 썼다.

고려 초 성종 8년에 최승로가 별세하자 왕은 뇌원차10근을 하사하였는데,모두 토산차였다. 단차(덩이차)인 뇌원차와 대차를 만드는 법은 신라인의 제다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로는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합병하기 전에는 차가 나는 호남과 영남에 영토가 없었고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너겨준 대는 935년으로 위의 성종이 많은 차를 하사한 때와는 기록상으로 50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또 고려는 통일한 후 신라왕조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다문화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단차의 제다법은 조선 말엽까지계속 이어져온 방법으로, 찻잎을 찌거나 데펴낸 후 절구에 찧은 후 모양을 찍어 말렸을 것이다.

 

 

단차의 제다법은 매우 발달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므로 , 제다법이 훨씬 간편하고 보다 원시적이라 할 수 있는 잎차도 기호음료로 쓰였음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잎차는 시들리거나 띠워서 발효시킨후 그냥 말리는 방법과 덖는 등 가열해서 말리는 방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에는 물에 차를 넣어 끓여서 마셨으므로 발효되지 않은 차는 끓이면 쓰고 떯으므로 발효차를 즐겨 마셨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을 통일하던 7세기에는 당나라의 산동성 등지에 신라인읭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으며 당에 유학한 승려와 학자가 많았으므로 당나라와 다문화도 일부 수용하여 승려와 귀족층은 중국의 차도 더러 마셨던 것 같다.

 

차 끓이는 법

 

최치원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진감선사 해소의 비석 글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생전의 인품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당시의 음다속을 짐작 할 수 있다.

 

누가 한명(중국차)을 주면 찻가루를 내지 않고 돌솥에 넣어 섶나무를 불때서 삶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떤지를 알고자 하지 않으며 그저 속을 적실 뿐이다. 라고 했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다. 여기서 한명이란 토산차가 아닌 상류층의 외국산 고급 단차로서 곱게 가루내어 끓여서 탁한 유다로 마시는 귀한 차인데도, 해소는 검소하게 그냥 돌솥에 넣어 끓여서 맑은 탕다로 마셨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사회의 차끓이는 방법은 가루내어 끓이기와 그냥 끓이기의 두가지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가 끓인 나중 방식은 조선 말엽까지 이어져 온 대중적인 차끓이기의 방법으로,

 

 

물끓이기 - 차넣기 - 잠시 더 끓이기 - 차구기로 뜨거나 걸러서 따라 마시기

 

앞의 가루내어 끓이는 방식은 중국 다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어 육우의 차 끓이기와 비슷한 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경]에 적인 <차달이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차를 불에 살짝 굽기 - 종이주머닝 넣엉 식히 - 가루내기 - 물 끓이기 -(첫끓음에) 소금으로 간맞추기 -(둘째 끓음에) 물 한 표주박 ㄸ내기 - 대젓가락으로 끓는 물 가운데 빙글빙글 휘저어 찻가루를 중심에 붓기 - 급히 끓어 거품이 쏟아져 흐르면 떠낸 물 붓기 - 잠시후 거품과 찻가루 고루 뜨기.

 

가루차의 차 끓이는 최치원이 "귀한 차를 받았으니 녹유:녹색젖과 같은 차)를 금정에 끓이고 항고(가루차의 향기로운 진액인)를 옥잔에 담아 마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라고 감격한 글에도 볼 수 있다.

 

지장의 "차를 달여 잔 속에서 꽃놀이 하는 것도 그만두리" 라는 시를 보면 구에 말차의 다유를 담아 차거품인 꽃을 즐기었음을 알 수 있고, 최치원의 앞글에서도 옥구가 나오면 충담스님이 경덕왕께 바친 차도 구에 담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고려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구도 고급차를 담는 찻잔이었던 것 같다. 굽이나 받침을 써서 신명제사용, 불전 헌다용이 따로 있었을 것이며, 왕이나 귀족에게 진다하는 고급 다구와는 구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급차를 담는  잔은 뒤에 남은 찻가루도 마셔야 하므로 잔입술이 바라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반 백성들이 거친차를 약이나 탕으로 끓여서 뜨겁게 마실 때 쓰던 당시의 토기찻잔도 흔히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물을 마시는 원시적인 그릇으로 흔히 쓰였던 것이 바가지인데, 가벼워서 지니고 다니기 편하므로 신라와 고대국가에서는 서민층의 야외용 찻그릇으로 나무로 된 찻잔을 흔히 썻을것이다.  나무 찻그릇은 깨지거나 썩기 쉬워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674년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에서 회색토기 차사발이 출토되었다. 그릇 바깥에 묵으로 그린 풀꽃과 구름이 있으며 "말이 정숙하면(바르면) 영화를 얻는다. 즉 차를 즐겨 마심으로 해서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짐작된다.

 

 

찻그릇은 일반 토기보다 저온에 구운 것으로 특별한 의례 때 사용되었으며 굽이 없는 뒷바닥의 모양으로 볼 때 굽이 있는 받침이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잔입술 바깥에 오목선이 둘려져 있고 전체적으로 흰 회색을 띠고 있으며 매우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다.

 

햇무리굽 청자 찻그릇

 

햇무리굽 청자 찻그릇은 신라말인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의 초기 청자 찻그릇으로, 굽바닥의 생김새가 해 주위에 두터운 테가 둘려져 있는 모양이어서 붙인 이름이며, 중국의  청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요지는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이었으며, 특히 경기도 용이눈 이동면 서리에서 발굴된 신라후기의 청자와 백자 햇무리굽 가마터는 당시의 발달된 도자기 문화를 증명한다.

 

안압지에서도 이러한 햇무리굽 청자가 발굴되었는데 잔의 안벽과 바닥이 매끄러우며 눈자국이 없으므로 고급 찻그릇으로 쓰였던 것 같다. 입지름이 13.5cm 정도의 작은 것에서 16.5cm인 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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