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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백성들의 차생활

by An마담 2019. 5. 1.

백성들의 차생활

 

 

 

 

다점은 오늘날의 찻집이다.

골의 백성들이 돈이나 베를 주고 차를 사 먹었던 다점은 술이나 음식 등을 파은 가게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초엽의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도, 다점은 백성들이 누구나 드나들어 차르 사 마셨던 오늘날의 찻집과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때도 토산차가 있었고 군민들이 차를 마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점이 있음은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농민의 지위도 향상된 당시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백성들이 사서 마실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차를 기호음료로 즐겨 마셨다. 

 

헌다

 

공덕제나 기우제때 신이나 부처께 차를 정성스레 올렸는데, 차는 신명도 좋아한다고 믿어 인간의 염원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고려의 일반 백성들도 연등회나 그 밖의 일에 영험을 얻고자 부처께 차를 올리고 복을 빌었다.

불전 헌다는 신라시대에도 흔히 있었다.

상례와 제례때도 차를 많이 썼던 것 같다. 신하가 사망했을때 왕이 많은 차를 하사하였다. 조선 초 [세종실록]에는 상례때에 시호를 내린 후의 의식과 영결을 고할 때 빈소를 열 때와 문 앞에서 상여가 나가기 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차를 영전에 헌다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상례에 차를 필요로 하므로 왕이 많은 차를 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불가의 제사에 차를 올린 연원은 오래되었다. 해소가 쓴 이자현을 위한 제문에는 "삼가 차와 과일과 안주와 반찬 등을 올려 공에게 경건히 고하나니"라고 하였다.

 

여성과 차

 

 

고려시대에는 차가 대중화되어 쉽게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왕이 전사한 군인의 처자나, 관리 중에서 나이 많은 어머니나 처에게 차를 하사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여성들도 음다생활을 즐겨 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조선 초 세종때 편찬한 농업서적인 [사시찬요]의 [누에치기]조를 보면 잠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쓰지 않고 차를 사용하여 누에칠 여인을 시켜 제사지낸다'고 하여 여성잉 제사다례의 제주가 되었는데 이는 고려 말에도 있었던 농업풍습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는 혼인과 이혼이 자유로왔으며 공경대부의 처나 선비의 처나 기생이나 복색의 구별이 없었던 점드을로 보아 여성들의 신분 차별이 심하지 않았음이 짐작된다. [고려도경]의 [누관]을 보면 당시 흔히 차를 마셨던 누각에서 여성들도 자유로이 지냈음을 볼 수 있다.

 

왕부이 동쪽에도 누각 둘이 하늘 높이 솟아 있어서 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노는 곳이라 한다. 사신이 그 곳을 지나게 되면 부녀드리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그들의 복식은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그 곳에 놀러갈 때면 그들은 비로소 비단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위에 의하여 지나가는 중국사신의 행렬이 구경거리여서 여자들도 위에서 내려다 보았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 경에 기녀 주씨가 원에서 차를 달이며 읊은 시가 전해진다.

 

맑게 갠 봄날

 

휙 날라서 지나가는 것은 뉘집 제비이며

곧바로 날아드는 것은 어디의 꽃인가.

깊숙한 원에 해는 길고 일이 없어

한 병의 봄 샘물로 차를 달인다네

 

이 글에서 주씨는 한적할 때 혼자서 차를 달여 마실 정도로 멋과 깊이가 있는 다생활을 했음이 짐작된다. 이 글은 [교방기]에 있는 것으로 교방이란 여악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이곡은 새로 지은 작은재실에서 [다완을 가냘픈 여인에게 받들게 하지 마라. 집안에 흐니 옷 입은 진인(본인)이 스스로 있으니] 라고 하여 차 끓이는 여성이 따로 있기도 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승려들의 차생활

 

불교와 차

 

고려는 태조때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불교가 현세에 복을 주고 나라를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왕실과 귀족의 보호 아래 매우 융성하였다. 서가가 도를 이룬 뒤 깨달음을 경문으로 써놓은 [화엄경]에는 

다시 광명을 비추어 차로 장식하니

여러가지 묘차가 가득하여 

온 누리에 두루 뿌려서 

모든 영혼에게 공양하도다

 

라고 하여 차를 온 누리(하늘과 땅)에 드리고 모든 영혼에게도 공양한다고 했으니 불교에서 차는 아주 소중했다. 조선 말엽의 대원군은 옛탑에서 구리로 만든 작은 부처 및 사리 등과 함께 네 덩이의 승설차를 발견했는데, 고려사람들이 차를 얼마나 신성시했나를 알 수 있다. 그 차의 표면에는 비늘과 수염이 있는 융이 있고 승설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으면 그 크기는 3cm의 정사각형에 두께는 1.5cm라고 하였다. 승설이라 함은 다유가 눈보다 흰 좋은 차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승려들은 일상생활에서 식후나 손님을 맞아 주로 차를 마셨으며 수행시에 차로 잠을 쫒기도 하였다. 사찰에서 쓴느 차는 왕실 못지 않은 고급차도 썼으며, 절에서 쓰는 많은 차를 공급하기 위해 절 주변에 많은 차나무를 재배하였고, 심지어는 절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공사다소도 있었다.

 

일상의 차

 

고려의 승려들은 차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식사 후 선방에서 차를 마시었고, 잠을 쫒기 위해, 혹은 문인 등 손님과 만나 마실거리로서 항상 차를 즐겼다. 또 부처께 올린 차는 다른 음식과 마찬가지로 다시 나누어 마셨을 것으로 본다.

선수행으로도 차를 마셨는데, 진각국사는 차를 마시며 조주선의 경지를 터득하고자 했다.

육우와 같은 시대를 산 당나라 조주종심의[끽다거] 이야기는 고려때뿐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가끔 언급되었는데[지월록]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두 승려가 조주에게 왔다. 스승(조주)이 묻기를, '여기에 처음 왔는가? 온 적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온 적이 있다' 하였다. 스승이 '차 한잔 마시고 가게' 하였다. 또 물으니 다른 승려는 '온 적이 없다'하였다. 스승이 '차 한잔 마시고 가게'하였다. 뒤에 원주가 묻기를 '왜 온 적이 있다고 해도 차를 마시고 가라 하고 온적이 없다 하여도 차를 마시고 가라 하였습니까?' 스승이 원주를 부르니 원주가 대답했다. 스승은 '차 한잔 하고 마시게' 하였다.

 

차를 마시어 마음이 열리면 알고자 하는 본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승려들이 일상으로 마시는 차는 형식에 얽메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시되 그 마음가짐이 깨닫고자 하는 진지한 자세였으리라 생각된다. 사찰내의 행사가 있을 때도 격식을 갖춰 차를 마셨는데, 당나라의 백장회해 선사가 쓴 선승의 생활규범인 [백장청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 원본은 없어졌으나 14세기에 엮어진 [칙수 백장청규]가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주지가 바뀔때나 새 수좌가 왔을 때, 초하루와 보름에 법당을 돌며 살필 때 등의 경우 점다를 하거나 다탕을 내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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