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웰빙

영국의 차 이야기

by An마담 2020. 7. 13.

영국의 차 이야기

 

 

 

 

영국인의 생활에서 차가 스타덤에 오른 것은 설탕 외에도 다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설탕과는 먼 인연이 있으면서 중독성이 있고, 다른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 그것은 바로 알코올이었다. 알코올음료, 즉 술은 차와는 다른 형태와 밀도를 가지고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국인의 식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 차가 존재하기 전에 그들은 아침에 무엇을 먹었을까. 부유한 삶의 아침상에는 양고기나 소고기스프, 빵과 비스켓에 에ㅇㄹ, 맥주 또는 와인을 동반했을 것이다. 이 메뉴에 해산물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새뮤얼 퍼프스는 그가 새해에 손님에게 제공했던 아침 식사를 '귤 한통, 깔끔한 소 혀 요리, 엔초비 요리, 각종 와인과 노스타운의 에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상인은 청어, 호밀빵과 에일을 먹었을지도 모르며, 구두수선공은 호밀빵과 맥주, 소년은 학교에 가기전에 죽과 빵, 버터와 백주를 먹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따르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술이었다.

모든 가정의 아침에 술이 있었던 이유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사람들이 타고난 술꾼이라는 오래전부터 흔히 하는 이야기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그거은 이유라기보다 오히려 결과에 더 가까웠다. 이상하게 들리겟지만 술은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위험한 음료는 맥주가 아니라 물이었다.

 

 

 

 

 

 

일찍이 1542년에 앤드루 보드라는 의사는 그의 저서<건강 식이요법>에서 "물을 그대로 마시면 영국인의 건강에 좋지 않으며, 차갑고 소화를 느리게 한다." 라고 썼다, 이것은 그나마 좀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었다. 여과와 정수 시스템이 발달하기 전의 식수 부족은 고질적이었고, 물은 온갖 종류의 박테리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인체에치명적일 수 있었다. 이것은 농촌에서도 문제였지만 런던은 더 심각했다.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하수도 설비는 조악하고 불충분했다. 목제 수도관을 19세기 말까지 사용했다. 아침 식상 물을 대신할 우유는 비싼데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이므로 위험한 음료로 인식되었고 결핵 같은 병을 전염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맥주는원료인 홉 덕택에 약간의 살균 효과가 있었을 뿐 만아니라 더 중요한 이점은 맥주와 에일 양쪽 다 기중한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알코올이 2퍼센트나 3퍼센트일 정도로 매우 약하기 때문에 '스몰'이라고 불렸던 맥주는 모든 가정에서 만드러져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마셨다. 일반적으로 양조주는 힘든 육체노동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필수품으로 인식 되었고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식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지농제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병원에서도 환자에게 술을 공급했다. 대학은 자체 맥주를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이튼 칼리지는 1875년까지 자체 맥주를 만들었다. 영국 해군의 선원들은 하루에 맥주 1캘론을 배급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 단골 술집에 데리고 가서 친구들과 동료들앞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취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식이 성인남자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소상인과 노동계급은 일반적으로 '성 월요일'을 준수했는데 일요일의 음주에서 회복하기 위해 월요일 하루는 음주를 쉬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상류계급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궁정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숙녀나 신사 양쪽 다 "아침, 점심, 밤에도 머리가 멍해 있었다.는것이다.

 

 

 

 

 

 

 

일상적으로 취하게 하는 음료의 부작용은 아직 대놓고 드러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냥 단순히 부작용이 있다고만 생각하는 정도였고,그보다는 더 즐거운 요소에만 치중할 뿐이었다. 배르 건조하고 법을 재정하고 카차를 끌고 옷을 바느질하고 계약에 서명하고 극본을 쓰로 나라를 운영하는 모든 사회 계층의 행동은 모두 취한 채로 이루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침식사에 엄청난 양의 독한 에일을 마셨는데, 여행할 때는 미리 사람을 보내서 지역 맥주의 맛을 확인하게끔 했다. 이런 관점에서 영국 사회가 어떻게 재대로돌아갔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왜 가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1700년대 새로운 강격한 음료가 네덜란드에서 들어와서 술 소비량을 완전히 새로운 레벨로 끌어올렸다. 제네버라고 불렀던 진이라는이름으로 유명한 이 술은 영국 사호 전역에 넘쳐흐르면서 사회를 취하게 만들었다.

 

 

 

 

 

 

진은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치명적인 것으로 제시카 워너가 <광기:이성의 시대의 진과 방탕>이라는 책에서 적은 것처럼 진은 도시의 마약이자 런던 빈민이 선택한 마약이었다. "1페니로 취할 수 있고, 2페니로 죽을 정도로 취할 ㅜ 있고, 청결한 돗자리는 무료"라고 진 가게 광고 문구는 노래하고 있었다. 청결한 돗자리가 무료라는 것은 아마도사람들이 진에 취해서 약간 부드러운 자이 위에서 잠들다가 술을 깰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리라. 빈민들은 싸고 빨리 취하는 진으로 배코픔과 추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에 스며들었던 모든 절망을 잊을 수 있었다. 진은 성인 남자와 여자만 마셨던 것이 아니라 어리아이들도 마셨다. 직접적으로는 아기를 짐재우는 데, 간접적으로는 진에 취한 유모의 젖에 의해 1750년경 '진 유행병'이 절정에 이르러서 연간 1인당 소비량은 2.2갤런, 1인당 맥주 솝량은 약 30갤런 이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영국제도에서 생활하는 모든 남성, 여성, 어린이가 하루에 진 한 잔을 마시고, 그 다음 맥주 1파인트와 반 잔을 더 마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말이다. 

 

 

'웰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차 사건  (0) 2020.07.14
영국 차 이야기  (0) 2020.07.14
차의 광고  (0) 2020.07.12
카멜리아 시넨시스  (0) 2020.07.12
차가 만들어지는 과정  (0) 2020.07.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