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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차의 유래

by An마담 2019. 5. 16.

차의 유래

 

차의 유래

 

 

 

1. 중국의 차

 

중국은 가장 오래된 다문화의 역사를 지녔다.[신농본초경經]-중국 최초의 약물학에 관한 전문 서적으로 본초경, 본경이라고도 불린다.. 진한 시기에 발간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 백성들이 오랫동안 의료 실천을 통하여 얻은 약물학 성과를 총결한 것이다. 원서는 소실되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증류본초등의 책 속에 찾아 볼 수 있다.

 

-[신농이 백 가지 초목을 맛보다가 하루는 72가지의 독을 먹었는데, (茶, 즉 茶)를 얻어 해독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1066년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복하였을때, 파촉지방에서 나는 차를 공납의 진품珍品으로 여긴 기록이 [화양국지華陽國志-중국 동진 영화 11년에 상거가 편찬한 화양 즉 파, 촉, 한중이 지리지이다.

 

고대로부터 진나라까지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쓰여있고, 연혁과 산물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에 있다. 그리고 춘추시대에 안영이 제濟나라 경공(547490 BC)의 제상이였을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전한다. 기원전 59년 서한의 왕포가 쓴 노비매매 문서인 <동약>에는 [무양에서 차를 사다] [차를 끓이다.]고 한 내용이 있다. 

 

중국에서는 약 5000년 전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 했다. 차나무를 인공재배한 역사는 30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농때도 지금처럼 차를 우려내 마신 것이 아니었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신선한 찻잎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배어나오는 차즙을 먹고 입안에 향기를 머금어 차의 상쾌한 느낌을 즐겼다. 이무렵 차의 음료라기 보다 약에 가까웠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수십년 묵은 차에 여러가지 한약을 넣고 달여서 약차로 마시는 민간요법이 있을 정도로 약으로 중국차의 전통은 유규하다. 차가 귀하디귀한 약에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은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의 일이다. 

 

다경과 육우

 

세계 최초의 다서 -육우 羽의 다경

-세계 최고의 차서 이다. 당나라의 육우가 지은것으로 3권으로 되어 있다. 육우의 출생년도는 확실치 않으나 당 현종의 개원 15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의 출생에는 두 가지 다른 설이 있으나 그것 또한 확실치 않다. 그는 주역의 점을 쳐 육우羽라는 이름을 지었다. 자는 홍점이었고 상우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어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차문화에 관하여 종합적이면서 최초의기록을 남긴 사람은 9세기 초까지 살다간  당나라 시인 육우(733~803)다경을 찬술하여 그 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그 이전에 (다도능경)이라는 글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육우는 다경을 쓰면서 (다도능경)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당나라 말기까지는 존재하였으이라 여겨진다.

 

육우 당나라 시대의 복주 경릉현 사람이다. 즉 현재의 호북성 천문사람이다. 당, 현종 개원 15년(727년) 용개사 부근 갈대밭에 버려진 아이를 이 절에 있던 승려 지적선사가 가엾게 여기고 거두어 키웠다. 자라서 스스로 이름을 짓기위해 (역경)을 가지고 점을 보아 성을 육陸으로 하고 이름은 우羽라 하고 자를 홍점이라 하였다.. 또한 용개사의 지적선사의 속성이 육陸씨였기 때문에 그의 성을 따랐다고도 한다. (신당서)(육우전)에 보면 그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육우의 본명은 질이다. 육우는 성질은 익살 스러웠고 평소에 문을 닫아 걸고,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벼슬자리를 삼가지 않아서 음악을 관장하는 영공 벼슬을 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거문고를 잘타는 여도사인 시인 이계란과 이름난 시인 사령운의 10세 손이며 불가의 스님인 교연과 육우 이 세사람은 서로 오가며 유불선 삼교를 터놓고 담론하며 거문고를 타고 시 작품을 읊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연 스님은 육우보다 대략 13실 정도의 연상이였지만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눴다. 교연스님이 쓴 또 다른 차시 최초로 다도 道라는 글귀가 나온다. 

 

 

'다도가 너를 온전히 진실되게 함임을 일아

오직 단구(신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다도'라는 말이 쓰여 졌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교연스님은 평생 육우와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다경'을 짖도록 독려하고 도왔다고 한다..

 

<다경>에서의 '경'經은 경전의 뜻으로 유가의 경전에 비유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자신이 지은 <다경>이 그냥 단순하게 차를 보통음료의 차원에서 해설한 게 아니라 차와 연관된 각 분야를 총 망라하여 학문적 해설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다서가 '차'의 '경전'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자신감에서 서슴없이 <다경>이라 망명하였을 것이다. 현존하는 <다경>은 중,하 총 3권 10장 7천여자로 구성되었다. 상권은 -(일지원. 이지ㅣ구. 삼지조) 차의 근원, 차를 만드는 방법과 도구, 중권은 (사지지) 1편만. 차의 그릇.

 

 

하권은 -(오지자. 육지음, 칠지사. 팔지출. 구지락. 십지도)등의 6편이 있어 차를 달이는 법과 마시는 법, 차 산지와 문헌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경>이 편찬된 이후로 음다법이 체계화되어 차가 일상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다경>은 차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과서로 그 중요성을 널리 인정 받고 있다.

 

육우는 스물한 살 때부터 중국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차 생산지를 무려 32주나 고찰하였다. 그리고 평생 동안 찻잎의 종식, 제다, 팽다, 음차등에 관한 연구를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였다. 상원초에는 초계에 은거하며 26년 동안이나 찻잎의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였고 영태 원년(756년)이후에 세계 최초의<다경.을 초고 완성하고 대력 ㅂ0년에 다시 증보하였으며 대력 14년 후에야 비로소 완성하여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는 단지 약용으로만 사용되던 차를 좀더 광범위하게 음용할 것을 주장 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라들에게 크게 각광을 받았음은 물론 당대 차업의 흥성과 중국 다문화의 정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원 19년 (803년) 향년 71세 병으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호주 천저산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주긍ㄴ 후에 후인들에 의해 다성으로 추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다신의 예로서 제사를 지냈다. 

'다경' 명칭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느시기에 누가 붙인것인지?

 

 

육우와 동시대 살았던 봉연은 자신의 저술한 <봉씨견문기>에서 "초나라 사람 육우가 다론을 지어 차의 공능을 말하고..."라고 하여 다론이란 말만 거론하였지 다경이란 말은 결코 기록하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문통목> 제 3권상에도 육우의 다기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경>의 <십지도>의 끝부분에 육우는 자신이 저술한 다서에 대해 결론을 내려 이에 다경의 시작과 끝이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라고 말라여 스스로 저술한 다서를 가리켜 서슴없이 <다경>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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