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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다구의 특징

by An마담 2019. 5. 28.

다구의 특징

다구의 특징

 

임진왜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다완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의 손때 묻은 찻잔을 훑어 가져갔고 사기장(도공)들을 잡아갔다 [일본 명물 다완의 8할이 조선도자기이다]라고 할 정도로 우리의 선비들이 쓰던 찻그릇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공경은 지극했다. 가마으 위치에 따라 정호(경남 언양), 웅천(경남 웅천), 오기(울산), 반사(부산부근), 김해(경남)등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 찻잔은 조선 초엽인 15~16세기의 것이 많다.

 

조선 말엽에 민영화된 분원 자기를 나라에 진상한 가격표를 보면 다관이 1냥5전, 다종 7전, 자완1냥 7전, 점다기 7전, 점다종7전,보아 2전 5푼~8전 수란 7전이었다. 선비들이나 서민들도 순백자 찻잔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다산의 아들인 정유산이 견향 스님에게 쓴 편지의 내용에는 [바라옵건데 흰 찻잔이 없어 푸른잔을 쓰고 있으니 변밥스러우나 작은 백색 잔 하나 구하고저 합니다]라는 글을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떡차를 만드는 다구가 여러가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도자기는 차가 많이 나는 지방에서 구운 것으로 실제로 차를 마셨던 그릇이다. 응송스님은 [우리 조상들 손으로 만든 우리의 찻잔들을 일본의 다인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에서 말하는 고려와 조선의 다완은 우리의 다구와 다완등을 뭉뚱그려 크고 작은 찻잔을 표현한 것이다. 백자는 태토가 흰색으로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도 간간이 생산되다가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되어 궁중용이거나 고급그릇으로 쓰였는데, 관영 도자기 가마에서 구운 분원 제품이 그 특징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떡차를 만드는 다구가 여러가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가장 많이 쓰여진 잔의 명칭은 완이었고, 그 다음이 종, 구이다. 고려시대의 문헌에 반 정도 쓰였던 구가 완의 1/3도 미치지 못함은 서니들의 음다풍속도 다탕을 중심으로 서민적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찻그릇은 청자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은 없으나 일상적으로 쓴느 잔인데도 급이 발달하여 기품이 있고 당당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다탕을 마시는 잔과 다유를 마시는 잔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았다. 단지 완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찻잔을 뜻하였고, 구는 의례용이거나 소중한 찻잔을 의미하였다. 

차사발은 아주 큰 찻잔을 말하는데 말차를 점다하여 마셨겠으나 다탕도 담아 마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게 잔입술 직경이 12~16센티미터 정도로서 당시에 라루차를 점다하여 마셨거나 또는 끓인 가루차나 다탕을 담아서 뜻맞은 몇 사람이 돌려가며 마시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전기에 우리 선조들이 쓰던 찻잔이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

 

그 찻잔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멋을 지녔고 실용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분청자외에 갈색 태토에 유약이 연하게 칠해졌고 잔우이 까칠한 가슬 차사발은 차유가 희게 돋보이며 잔울에 손이 닿는 감각이 독특하다. 정화차사발은 구봐 몸체의 조화와 당당함, 허리의 칼바람 자리, 푸근한 잔울, 유약이 엉긴 더뎅이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손바닥의 촉감등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초탈의 멋이 있다. 자연과 벗하며 산림에 묻혀 사는 가난한 선비들의 손에서 참으로 사랑받던 찻그릇임직하다.  웅천 찻잔은 차사발로도 쓰였고 다탕의 잔으로도 쓰였던 것 같으며, 말엽에 [차오보]라고 불리웠던 잔이 아닌가 짐작된다. 웅천은 차가 많이 나는 창녕과 김해 사이로서, 본래는 신라의 웅지현인데 경덕왕이 웅신이라 고쳤고, 조선 문종때에 웅천현이라 했으며, 조선시대까지 전해온 풍습에는 매년 4월과 10월에 웅산 사당에 있는 신을 모시고 마을에 내려와 제사 지내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웅신은 단군신화에 환웅(하늘을 숭상하는 부락)과 결혼한 웅녀(곰을 숭상하던 부락의 수호신)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여성이 삼신단(환인.환웅.환검을 모신 자리)에 햇차를 달여 올리고 소원을 빈 차농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웅산신을 모시고 제사 지낼 때나 잔치때에 웅천에 흔했던 차와 찻잔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전에 올린 다기는 의례용으로 쓰인 찻잔으로 잔모이 바라지지 않은다구에 속하나 일상의 다구와는 다른 모양으로 발달하였는데 굽이 유달리 높아 잔받침을 대신하였다. 조선 말엽에는 불전에 헌다할 때 [다종]을 쓰기도 하였으며 몹시 큰 놋쇠 다기도 흔히 있었다.

 

유발은 사발의 잔입술이 귀대모양으로 튀어나와 차를 따르기 좋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본래 말차(가루차)의 다유를 점다하여 잔에 따르던 사발이었는데, 중엽 이후 말차가 거의 쓰이지 않게 되면서 약방에서 약을 가는데 쓰이는 도구로 발달하고 또 다탕을 각잔에 나누어 따르는 그릇으로 쓰이게 되었다. 유발은 삼베나 용수를 놓고 끓인 차를 부어 거른 후 각잔에 따랐으므로 다병이나 다관을 대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유발에 다탕을 부어 다시 각잔에 따르거나, 고급 녹차를 우릴 때 뜨거운 물을 부어 조금 식히기도 한다. 말기에는 [다병]이 쓰이지 않고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다관]이 쓰였다.

한때는 호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초기의 구리다관과는 용도가 다르다. 말기에 분원자기를 진상한 가격표에 의하면 다관의 값은 술병의 값과 동일했다고 한다.

 

구리다관은 겉은 구리인 반면 안쪽은 차맛이 손상되지 않도록 회백색의 주석으로 입혀져 있다. 다관안에는 부리체가 있어서 끓인 찻잎이나 떡차를 거르도록 되어있다. 뚜껑은 어귀 바깥을 덮는 바깥덮개로 꼭지는 연봉오리로 되어 있고 ㅗㅇ오리가 뱅글뱅글 돌아가게 만들어져 있다. 세종때 명나라 사신 진경에게 구리다관을 하사한 것을 보면 아주 멋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조선초 하연은 [철탕관]을 선물받고 사례하는 글을 남겼으며 질그릇으로 된와관에도 차를 끓였다.

 

 

차를 끓일때 불을 담거나 피우는 것으로 [다로]를 썼다. 바람구멍이 있어 나무나 숯을 피우기에 편리한 풍로가 있고, 실내에서 뜨거운 것을 막기 위해 나무나 대로 화롯가를 둘러싼 목로나 죽로도 흔히 썼으며, 철, 놋쇠, 돌화로와 질화로도 있었다. 다조(차화덕)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흔히 쓴 것으로 다산은 특히 다조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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