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웰빙

차(茶)의 역사

by An마담 2019. 5. 23.

차(茶)의 역사

 

차(茶)의 역사

 

한국은 2000년 전인 가야시대에 허황옥 왕비가 차씨를 갖고 왔다는 차 전래설이 있다. 가야는 그 기원과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신비의 나라다. 허황옥 차 전래설이 내려오는 김해지역 일원에는 "장군차"(황차)야생군락지가 여럿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일본 야부다기종)과 중국 소엽종과 그 개량의 차가 재배되는 것과 달리 김해지역의 장군차도 인도 대엽종으로 찻잎이 크고 타닌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허황옥에의 한차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해에 수로왕비능이 있다. 묘앞 비석이 중국돌이란 점에서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우리나라 차 전래된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기 48년 즉위 7년을 맞이한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199)에게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33~89)이 시집온 경위를 이야기한 대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때 혼수로 가져온 물품중에 "차(茶)씨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나라가 차나무 전래이전에도 차(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다. 진흥왕(540~575)때도 차마신 기록이 있다. 경덕왕(742~764)충담사의 차에 얽힌 이야기등으로 미루어보아 차를 매우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덕왕 3년 (828)대렴이 당으로부터 차종을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이후부터 지리산 중심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신라시대 최치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 당나라의 과거급제 하였다.(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부모님께 차와 편지를 보냄)당나라(618~906) 시대상황으로 보면 활발한 교역이 있었으므로 쌍계사에는 최치원에 교지를 받아 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가 있는데 여기에 차에 관한글이 적혀있다. -고려시대-불교와 함께 성황하였고 -조선시대- -현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차(茶) 역사 (歷史)

 

우리나라ㅏ에 차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차에 대한 사료가 적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모두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것은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본기>제십 흥덕왕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으니 성행하기로는 신라42대 흥덕왕3년(서기828년)에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茶)씨를 가져다가 왕명(王命)으로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는 기록뿐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동십이월 견사입당조공 문종소대우린덕전연사 유차 입당회사 대렴지 다종다래 왕사식지리산 채자 선덕왕시유지이어차 성언- 겨울 12월(통일신라 제 42대 흥덕왕 3년 828년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니 당 문종이 인덕전으로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었다. 당나라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대렴(대렴의 성은 대(大) 씨-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고유의 성씨임-이고 이름은 렴이다. 이에대해 김대렴이 옳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차의 종자를 가져오니 왕이 그것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미 차는 선덕왕(632~646년)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외래유입설에 반해 우리차의 자생설도 주장되고 있다.

이외에도 차의 전래에 대한 전설은 많이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대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비가 차(茶) 씨를 가져와 백월산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기해백월산유죽로차세전수로왕비허씨자인도지래지다동-김해의 백월산에는죽로차가 있었는데 새상에서는 가야의 수로왕비 허씨:허황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함)가 인도에서 가져온 (48년)차씨를 심어서 된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기록을 보면 선덕왕때에도 이미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차(茶)의 정착

 

우리민족은 7세기에 음다풍속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여러가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차는 선덕여왕(632~647년)때부터 있었다. 기록된바로는 적어도 647년에는 차나무나 음료로서 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육우보다 반세기 앞선 다인인 설총 (薛聰)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신무놩(681~692)에게 화황을 비유해 간하였음을 알 수 있고 원효도 굴 속 암자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그 뿐아니라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에는 가야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 30대-문무왕은 시기 661년 3월 조서를 내린다. 가양국 시조인 김수로 왕은 나의 외가 15대 조상이므로 가야국 종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한다. 아마도 가야의 오랜 차례의 전통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토산품이 아닌 수입품을 제사상에 놓았을 리가 없으며 상례나 제례등의 풍습이 정착되려면 3대이상 걸림을 생각할 때 차가 많이나는 가야에서는 적어도 6세기에 차를 기호음료로서 마셨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또한 사선四仙의 전다구와 보천.효명태자의 헌공다례 기록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돈차.자장의 제자 조일의 차나무 재배등도 7세기에 다문화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다신전은 초의 선사가 [만보전서]에 수록된<채다론>을 뽑아내 독립된 책으로 만든 것인데, 차생활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해거도닌 홍현주를 위해 만든 책인데 당나라 육우의 [다경]에 견줄만한 차를 칭송한다, 라는 뜻을 가진 서사형식의 시이다. 서울 살던 정조의 사위 홍현주가 진도부사 변지화에게 차에 관해 물어본것이 계기가 되어 초의가 1837년(52세) [동다행]이라는 제목을 붙여 저술하여 마친글이다.

 

오직 홍현주를 위해 탄생한 [동다행]은 나중에[동다송]이라고 했다. 초의는 실학자인 정약용고 뜻하지 않았던 인연과 또 그로 인한 사대부들과의 인맥과 학문, 자신의 문학적 재능등이 어우러져 지적 목마름을 맘껏 충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인 아암혜장과 강진으로 유배와 있던 정약용을 초의보다 먼저 백련사에서 만나 교류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초의가 정약용에게 유학을 배우고 차를 만들면서 사대부들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맺어졌다..

 

 

[다신전]과 [동다송]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차이론에 대한 생각하는 계기가 된것이 틀림없다. 

*최초의 다서는 이운해(1710~?)가 1757년 일기에 기록한 [부풍향차보]인데 보다 30년 앞선다.

*그 다음은 이덕리(1728~?)에 지은 '기다' 이다.

*박영보(1808~1872)가 1830년에 지은 [남차병서]와 그의 스승 자하.신위(1769~1845)가 영향으로 초의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급부상한 명성이 홍현주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된것이 [동다송]의 탄생이 계기가 되었다. [동다송]의 바탕이 되는 인용의 뼈대는 <다경>과[속다경][만보전서]로 이루어져 있다. 초의가 인용한 많은 시구들도 [[속다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웰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쪽염색에 대하여  (0) 2019.05.28
다구의 특징  (0) 2019.05.28
茶(다)문화  (0) 2019.05.21
차의 보관  (0) 2019.05.20
차의 예법과 다례  (0) 2019.05.17

댓글